공감의 숲
어찌 어찌 흐르는 세월에 업혀, 나는 어느 날 기장 사람이 되어 있다. 죽성을 거쳐 장안 작업실에서 작업을 시작한지 어언 20여년. 산 속 작업실 생활이, 그리 녹녹치 않은데도 그럭저럭 버티다 보니 세월은 가는구나 싶다. 추울 때는 솜옷으로 몸을 감싸고 뽈따구에는 징기 징기 앙광이를 그리고 선조들이 삼베 한 조각으로 추위를 이겨내던 흘러간 옛날 옛적 이야기를 굳이 들먹여 스스로를 위안해 보기도 하며, 또 한더위 때는 제초제를 뿌리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처연하게 잡초와 함께 사는 쪽을 택한다.
자다가 지네에 물리기도 하고, 말벌에 한번 물린 후로는 수시로 처마 밑을 살피면서, 이놈의 말벌은 초고속으로 집을 짓기 때문에 큰 변을 당하기 전에 즉시 제거 해야만 한다. 고라니와 꿩은 물론 이거니와 산돼지 우는 소리도 종종 듣는, 별님과 달님이 사는 동네. 자연의 에너지가 충만한 곳.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그 곳에 있다. 아침에 눈 뜨면 산새들 먹이, 나무 둥걸에 걸쳐둔 새 모이통에 쌀을 조금 부어 주고, 길냥이 사료를 퍼 주고…….
영화인이 되고 싶은, 음악가가 되고 싶은, 조각가가 되고 싶은, 소설가가 되고 싶은 소녀는 전혀 재능이 없는 생활인이 되어 남이 준 옷에 내 몸을 맞추려고 노력 했던 것 같다. 결혼도, 출산도 재능 있는 사람만 해야 한다면 궤변이라 할 수도 있겠다.
부산에서 개인전 4회를 하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는 전시장을 지키면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서울 인사동에 작품을 짊어지고 전시 하러 처음 올라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생각 외로 환대 받았고, 여기 저기 초대 받게 되고, 기획 하겠다는 친구들도 생겨 좀 특별한 전시도 기획했다. 그 때 그 샴페인 파티와 영국유학파 젊은 친구들의 디제잉 퍼포먼스는 인사동의 인기였다. 관장님은 그 촌에서 서울 사람들도 생각 못하는 것들을 한다고 신기해 하셨거든…….
통인 옥션에서 전시를 끝내고 서울 라메르 갤러리에 3개월 후에 전시계약을 하고 통인 익스프레스에 작품 일부를 맡기고 작업실에 돌아와서 다음 전시를 열심히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새 작품을 싣고 라메르에 도착, 통인에서 가져다 준 100호 작품들 몇 점을 풀었을 때, 난 꼭 그리운 연인을 만난 듯 반가운 눈물의 기억은 잊혀 지지 않는 영화 같은 한 장면이다.
그 때 알았다. 작품은 사물이 아니라는 것을, 작품은 그 사람의 인생이고 눈물이고 기쁨이고 사상이다. 연인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는 걸.
“색채를 액체 상태에서 고체 상태로 전이 시켜야 할 필연성을 가질 때 색채를 살아가는 것이 된다” 남천동 집 근처에 화실을 얻어 나올 때 적어서 벽에 붙여 놓았던 글귀는 누렇게 바랜 채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도 나를 따라다녀 지금도 화실 벽에 아무렇게나 붙어있다. 그 초라한 종이 한 장이 나를 꼭 지켜 줄 것 같았다.
예술행위란 나에게 있어 외투 같아 보이지만 기실은 나의 속옷이다. 끝없이 빠져드는 사상 속에서의 이상적 전망이란 이미 그 어느 것도 그 무엇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에 이르러 있다.
작품으로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는게 가끔은 두려울 때가 있다.
한 사람의 내면과 사상과 철학이 온전히 작품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만난 한 예술가는 다른 작가와는 달리 구석탱이에 앉아 있다.
자신은 유명해 지고 싶지 않다, 이 세상에는 유명한 사람이 너무 많고, 유명한 것
들도 많으니, 나는 이대로 되었다 하였다.
무엇이 되는 것 보다 무엇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게 예술행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글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가 사라졌다 (0) | 2019.01.09 |
---|---|
문재인 대통령 베를린 선언, 그리고 남북 정상 회담 (0) | 2018.04.30 |
산 고양이 (0) | 2017.11.02 |
명함 만들기 (0) | 2017.10.25 |
사랑과 학대를 혼동하는 (0) | 2017.10.24 |